AI 시대, 건축가에게 그래스호퍼가 여전히 강력한 무기인 이유

2025. 9. 27. 03:53Computational Design

"AI가 멋진 이미지를 순식간에 만들어주는데, 굳이 복잡한 그래스호퍼(Grasshopper)를 따로 공부해야 할까?"

 

"Python"과 같은 Text coding 방식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은데 굳이 그래스호퍼(Grasshopper)를 따로 공부해야할까?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을 공부하는 분이라면 위의 질문을 한 번쯤을 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워낙 빠르다보니 언젠가 이 글은 옛 정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 컴퓨테이셔널 디자이너로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생각을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래스호퍼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건축가와 디자이너에게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복잡한 형태를 만드는 것을 넘어, '생각의 확장', '구축의 정밀함', '통합적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스호퍼를 배워야 하는 3가지 이유

AI를 논하기에 앞서, 그래스호퍼가 왜 그 자체로 강력한 디자인 도구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직관적인 제어와 즉각적인 피드백

그래스호퍼의 가장 큰 강점은 '즉각적인 시각적 피드백'입니다. 코드를 실행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넘버 슬라이더를 움직이는 즉시 라이노 뷰포트에서 지오메트리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디자이너가 아이디어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가장 직관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2. 코드보다 효율적인 '함수 덩어리'

순수 '데이터 처리' 관점에서는 Python이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스호퍼의 컴포넌트는 단순한 코드 한 줄이 아닌, 고도로 압축된 '함수(Function) 덩어리'입니다. 예를 들어 Loft 컴포넌트 하나에는 복잡한 지오메트리 계산, 각종 옵션 및 예외 처리 등 방대한 코드가 이미 담겨있습니다. 덕분에 디자이너는 코드 개발이 아닌 디자인 논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3. 통합 설계를 위한 무한한 확장성

Computational Design of the Smart Slab. (Andrei Jipa ❘ dpt)

그래스호퍼는 Karamba(구조), Ladybug(환경), Kangaroo(물리 시뮬레이션) 등 수많은 서드파티 플러그인을 통해 기능이 무한하게 확장됩니다. 건축가는 그래스호퍼를 단순한 형태 생성 도구가 아닌, 디자인 초기 단계부터 성능을 분석하고 최적화하는 '통합 설계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 그래스호퍼의 새로운 역할

최근 AI의 발전은 그래스호퍼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1. Generative AI의 '아이디어'를 '건축'으로 전환하는 도구

이미지 생성 AI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공하지만, 그 결과물은 실제 '구축'에 필요한 핵심 요소(정밀한 치수, 재료, 구조 논리)가 부족합니다. 건축은 단순히 형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시공오차(construction tolerance)에 따라 디테일이 달라지는 등 현실적인 제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이 간극을 메우는 가장 현실적인 워크플로우는 아래와 같습니다.

 

AI Ideation → Grasshopper Development → BIM Modeling

 

  1. AI로 영감을 얻고 (Ideation): AI가 생성한 이미지나 매스를 초기 디자인의 영감으로 활용합니다.
  2. 그래스호퍼로 건축적 재해석 (Development): 디자이너는 그래스호퍼를 사용해 AI의 아이디어를 구축 가능한 정밀 지오메트리로 재해석하고 구체화합니다. 이 단계에서 시공성을 고려한 디테일과 데이터가 부여됩니다.
  3. BIM으로 신속하게 전환 (Documentation): 완성된 그래스호퍼 모델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성되었기에 Rhino.Inside.Revit과 같은 도구를 통해 효율적으로 BIM 데이터로 전환되어, 실시설계 및 시공 단계로 연결됩니다.

그래스호퍼는 이처럼 AI의 아이디어를 실제 건축물로 구현하는 '실무 워크플로우의 핵심 허브'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2. 데이터 부재, 데이터 생성 엔진으로서의 역할

더 나아가, AI의 활용은 비단 형태 생성을 넘어 도면 검토, 법규 체크, 레이아웃 자동화 등 다양한 건축 프로세스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분야에서 AI가 마주하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학습을 위한 '양질의 데이터 부재'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래스호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래스호퍼의 파라메트릭 제어 능력은 건축가가 직접 '데이터 생성자(Data Generator)'가 될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법규와 조건을 만족하는 수천, 수만 개의 아파트 평면 대안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각 대안의 성능(일조, 조망 등)을 분석한 데이터를 함께 라벨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성 및 증강(Augmentation)된 데이터는 특정 목적(ex: 평면 최적화 AI)을 가진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데 가장 이상적인 재료가 됩니다. 따라서, 그래스호퍼는 단순히 AI의 결과물을 받아쓰는 도구가 아니라, AI가 더 건축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생성하고 공급하는 능동적인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Case Study: Zaha Hadid Architects가 Generative AI에게 '건축'을 가르치는 방법

Proposed Workflow for Diffusion Model (Zaha Hadid Architects)

2024년 Autodesk University에서 ZHA는 그래스호퍼를 AI에게 '건축'을 가르치는 데이터 생성 엔진으로 활용한 사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Tectonism'이라는 디자인 언어이자 철학을 Diffusion Model에 학습시키기 위하여, 3D 모델에 건물 프로그램, 구조, 재료, 제작 방식 등의 '건축적 태그'를 부여하고, 구조 및 환경 시뮬레이션으로 '성능이 검증된' 데이터셋을 구축합니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훈련된 ZHA만의 커스텀 AI는 단순히 피상적인 스타일만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구축이 고려된 건축적 논리를 이해하는 파트너로 경쟁력을 갖습니다. 이는 그래스호퍼가 더 지능적인 건축 AI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이는 건축가 혹은 컴퓨테이셔널 디자이너가 주체적으로 AI모델을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을 확장하고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자세한 사항은 Autodesk University 자료에서 확인가능합니다.)

 

3. 목표 지향적 '최적화' vs. 가능성 탐색의 'AI'

그래스호퍼의 또 하나의 강점은 '최적화 알고리즘'과의 결합이 쉽다는 점입니다. 이는 AI의 접근 방식과 대조를 이룹니다.

 

유전 알고리즘으로 찾아낸 콘서트홀 음향 반사판의 최적 디자인(Pareto Front) 결과물들 (필자의 졸업작품)

 

최적화 (Genetic Algorithm 등): 목표 지향적 탐색 그래스호퍼의 Galapagos나 Wallacei 같은 플러그인을 활용한 최적화는 디자이너가 명확한 '목표(Objectives)'와 '규칙(Variables & Constraints)'을 설정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냉방부하를 줄이기 위해 일사량은 최소화하지만, 실내 일조량은 높아야 하는, 최적의 PV배치 각도" 것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부여하면, 알고리즘은 이 조건을 만족하는 최상의 결과값을 무수히 많은 대안 속에서 탐색해냅니다. 디자이너가 문제 정의의 주도권을 가집니다.

 

다양한 재료의 조합을 테스트하기 위해 생성했던 이미지 (Midjourney)

 

AI (Generative AI): 가능성 탐색 반면, 현재의 생성 AI는 학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있을 법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해와 산을 모티브로 한 미술관"처럼 추상적인 키워드를 던지면, 그럴듯한 이미지를 생성해냅니다. 이는 창의적인 발상에는 도움이 되지만, 건축물의 성능이나 효율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이 둘은 대체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 관계입니다. AI로 얻은 영감을 그래스호퍼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최적화하는 워크플로우는 매우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머신러닝(ML)을 최적화 과정에 통합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조나 환경 시뮬레이션은 한 번 실행하는 데 수 분에서 수 시간이 걸릴 수 있어, 수만 번의 반복이 필요한 최적화 과정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이때 회귀(Regression) 모델과 같은 머신러닝 기법이 사용됩니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미리 계산한 뒤, 이 데이터셋을 머신러닝 모델에 학습시켜 시뮬레이션 결과를 빠르게 '예측'하는 '대리 모델(Surrogate Model)'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측 모델을 최적화 프로세스에 통합하면, 디자이너는 기존에 몇 시간씩 걸리던 작업을 단 몇 분 만에 수행하며 훨씬 더 넓은 디자인 탐색 공간에서 최적의 해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는 시간과 자원의 한계를 넘어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는 매우 강력한 방법론입니다.


Result

AI의 맹목적 팔로워가 될 것인가, 파트너로 활용할 것인가

AI 기술은 설계 과정의 많은 부분을 자동화할 것입니다. 매일 새로운 AI모델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단정지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한가지는 확실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축가는 AI가 제안하는 결과물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팔로워'가 될 것인지, AI를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강력한 '파트너'로 활용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AI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 즉 '문제 정의 능력'과 '목표 설정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어떤 건물이 좋은 건물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컴퓨테이셔널 툴로 증명하고 실현해내는 능력.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우리가 그래스호퍼와 같은 논리적 설계 도구를 계속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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